[경향신문]변호사와 예능PD는 왜 총을 들었나

[경향신문]변호사와 예능PD는 왜 총을 들었나

다큐앤드뉴스코리아

키이우 | 박은하 유럽 순회특파원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동부 전선과는 거리가 먼 키이우에서도 병사는 어디에서나 눈에 띈다. 식당, 카페, 지하철, 버스터미널 등 일상 공간 어디에서나 군복 입은 이들을 만날 수 있다.

2022년 2월24일 러시아의 전면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에서는 징집병과 자원병을 합쳐 약 90만명이 병력으로 동원됐다. 지난 1년 간 발생한 우크라이나 사상자 수는 최대 10만명 수준일 것이란 추정이 나온다. 병역에 대한 공포와 거부는 침공을 당한 우크라이나에서도 존재한다.

하지만 전쟁의 가장 참혹한 폭력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 물러서지 않는 병사들 역시 적지 않다. 올레크 시모로스(25)와 니콜라이 코발(39)이 그런 이들이다. 전쟁은 변호사와 예능PD의 손에서 법전과 카메라를 빼앗고 총을 쥐어줬다. 오는 24일 러시아의 침공 1주년을 앞두고 이들이 군인으로서 겪은 지난 1년의 이야기를 들었다.

두 다리 잃었지만 나라는 지켰다…상이군인이 된 인권변호사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서 군복무를 하던 중 두 다리를 잃은 올레크 시모로스(25)가 지난 17일 키이우의 오베리흐 병원에서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지방정부의 인권 정책을 모니터링하는 변호사였던 그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2022년 2월24일 자원 입대했다.   키이우 | KISH KIM·다큐앤드뉴스코리아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서 군복무를 하던 중 두 다리를 잃은 올레크 시모로스(25)가 지난 17일 키이우의 오베리흐 병원에서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지방정부의 인권 정책을 모니터링하는 변호사였던 그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2022년 2월24일 자원 입대했다. 키이우 | KISH KIM·다큐앤드뉴스코리아

지난 17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키이우에 있는 오베리흐 병원에 들어섰다. ‘오베리흐’는 우크라이나어로 ‘수호자’(Guardian)이란 뜻이다.

올레크는 이불을 머리맡에 말끔하게 개어놓고 정자세로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짧은 환자복 하의 아래 드러난 허벅지 절단면의 보랏빛 수술 자국이 꼭 전차 궤도 같았다. 손가락에도 마디마디 보랏빛 상처와 흉터가 그어져 있었다. 얼굴은 비교적 깨끗했지만 이마에 베인 자국이 선명했고, 앞니 하나가 빠져 있었다. 무어라 위로를 전해야 할 지 몰라 쩔쩔 매는 기자를 그는 담담한 미소로 맞았다.

인터뷰 중 전쟁 트라우마가 올 것 같으면 언제든 이야기를 중단해도 된다고 얘기했지만, 그는 괜찮다고 했다. 지난 1년 간 벌어진 끔찍한 전쟁의 기억들을 떠올리면서도 그는 단 한번도 시선을 돌리는 법이 없었다.

올레크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 지방정부의 인권 정책을 모니터링하는 변호사였다. 우크라이나에서 대학생은 기초군사훈련만 받는 것으로 군복무를 대신할 수 있다. 따라서 군복무 경험이 없는 올레크는 우선 징집 대상이 아니었지만, 그는 2022년 2월24일 러시아의 전면 침공 소식을 듣자마자 훈련소로 달려가 입대신청을 하기 위해 줄을 섰다.

그는 “정말 긴 줄이었다”고 회상했다. 첫날은 무기가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돌려보내졌다. 입대하려고 몰려든 사람들이 무기보다 많았던 것이다. 끈질긴 기다림 끝에 그는 결국 소총을 지급받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2시간 만에 키이우 외곽 도시 이르핀에 배치됐다.

맡은 임무는 보병 소총수. 전장에서 죽을 확률이 가장 높은 위치였다. 이르핀에 도착한 지 1~2시간 만에 러시아의 포탄이 비처럼 쏟아졌다. 군 경험이 없는 그가 처음 맞닥뜨린 실전이었다. 포탄에 맞지 않기 위해 하루종일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참호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는 “미친 숫자”였다면서, 러시아의 끊임없는 포탄 공세는 “물리적일뿐 아니라 심리적인 공세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두렵지 않았냐고 묻자 올레크는 “두려웠다. 모두가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의 도시와, 나의 나라를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보다 더 컸다”고 말했다.

그는 하루종일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 전쟁 발발 첫날 군 훈련소 앞에 모여들었던 그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연설을 되뇌었다. “우리는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독립과 국가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됐다고 올레크는 말했다.

지난해 4월 이르핀을 비롯해 키이우 인근 지역에서 러시아군이 물러가자 올레크는 돈바스 전선인 크라마토르스크 인근 부대로 재배치됐다. 전선은 여전히 참혹했다. 가족이나 여자친구에게 연락을 하고 싶었지만 휴대전화를 사용했다가는 위치를 들킬 수 있기 때문에 참았다. 그는 “그것이 러시아군과 우리가 다른 점”이라며 “나와 동료를 위험에 빠뜨릴 순 없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러시아는 병사들의 잦은 휴대폰 사용 때문에 도·감청에 걸려 군막사 위치가 노출된 바 있다.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서 군복무를 하던 중 두 다리를 잃은 올레크 시모로스(25)가 지난 17일 키이우의 오베리흐 병원에서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키이우 | KISH KIM·다큐앤드뉴스코리아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서 군복무를 하던 중 두 다리를 잃은 올레크 시모로스(25)가 지난 17일 키이우의 오베리흐 병원에서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키이우 | KISH KIM·다큐앤드뉴스코리아

두 다리를 잃는 사고는 지난해 10월 찾아왔다. 그해 10월 20일 아침, 평소처럼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차량을 운전하던 중 대전차 지뢰를 밟고 말았다.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고, 그는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하루 만에 깨어나니 드니프로의 병실이었다. 손, 얼굴 등 온 몸이 상처투성이었지만 특히 다리에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꽉 묶은 지혈대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두 다리는 잘려져 있었다.

아버지가 옆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러시아군 침공 첫날부터 군 복무 중인 아버지는 군에서 지뢰 매설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올레크는 아버지에게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에 꽂힌 호흡장치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와 여자친구가 키이우에서 드니프로로 달려오고 있다는 소식에 위안이 됐지만 그들이 받을 충격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올레크는 “다행히도 우크라이나에서는 누구나 이런 상황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병원에서 재활훈련을 하고 있다.

전선에서 들려오는 잔인한 소식에 그는 누구보다도 마음이 아프다. 본인이 겪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각의 평화협상에 대한 이야기에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올레크는 “지금 러시아는 나치 독일과 같은 일을 하고 있다”며 “우크라이나인들은 지금 우크라이나 뿐 아니라 세계를 위해 싸우고 있다 ”고 말했다.

올레크의 병상에는 색연필로 그린 공룡 그림이 붙어 있다. 친구의 여섯살 난 아들이 그려준 그림이다. 아이 아빠인 친구 역시 현재 군 복무 중이다. 그는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자신이 많은 시민들의 응원 속에 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올레크는 “나에겐 더 중요한 미래가 있기 때문에 과거를 생각할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이 끝나면 일단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그리고 인권변호사로서 꿈꿨던 사회운동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더 좋은 삶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사회가 좀 더 정의롭고 평등하길 바랍니다. 저는 그런 걸 가능하게 하는 일들을 하고 싶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선으로 향하는 기차와 돌아오는 기차 주변에는 늘 만남과 헤어짐이 있다. 소총을 어깨에 멘 한 군인이 연인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다.   KISH KIM·다큐앤드뉴스코리아

우크라이나 전선으로 향하는 기차와 돌아오는 기차 주변에는 늘 만남과 헤어짐이 있다. 소총을 어깨에 멘 한 군인이 연인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다. KISH KIM·다큐앤드뉴스코리아

탱크를 상대로도 물러서지 않는 예능 PD

노보라드 볼린스키, 리시찬스크, 이지움, 바흐무트….

니콜라이 코발(39)이 지난 1년 동안 거쳐온 전장터들이다. 키이우 방어전부터 하르키우 수복전까지, 우크라이나 전황의 주요 변곡점마다 그가 있었다.

지난 18일 키이우의 크름 타타르 레스토랑에서 만난 니콜라이는 군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강건한 표정과 절도 있는 태도가 영락없는 베테랑 군인의 모습이었지만, 사실 그의 원래 직업은 방송국 예능PD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두번째 군 생활을 하게 된 니콜라이 코발(39)이 지난 18일 키이우의 한 식당에서 자신이 겪은 전쟁 1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키이우 |  KISH KIM·다큐앤드뉴스코리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두번째 군 생활을 하게 된 니콜라이 코발(39)이 지난 18일 키이우의 한 식당에서 자신이 겪은 전쟁 1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키이우 | KISH KIM·다큐앤드뉴스코리아

니콜라이의 전쟁은 2022년 2월 24일이 아니라 2월 20일에 시작됐다. 우크라이나에서 예비군 동원령이 내려진 날이다. 군 복무 경험이 있는 그는 다가올 전쟁을 예감하고 17일부터 일찌감치 짐을 싸 놓았다.

2월24일 새벽 3시부터 시작된 미사일 폭격 소리에 잠을 깼다. 벨라루스와의 접경 지대에 있던 그의 원 소속 부대가 사실상 러시아군에 전멸당해, 새로 편성되는 부대에 합류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문제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사실 문제가 있었습니다. 키이우에서 약 220㎞ 떨어진 노보라드 볼린스키의 부대에 가야하는데, 고속도로가 피란 차량으로 가득 차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그 순간 누군가가 붓과 페인트를 가져와 미니버스에 임시방편으로 국방부 마크를 그려넣었다. 이게 통할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모세의 기적’이 일어났다. 국방부 마크를 본 시민들이 자기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에도 일제히 순서를 양보해 길을 터준 것이다. 첫 전투를 앞둔 그에게 시민들에게 받은 전폭적인 지지와 응원은 엄청난 힘이 됐다.

그러나 부대에 도착한 후 마주친 현실은 암담하기만 했다. 부대원 30명 중 군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를 포함해 단 2명 뿐이었다. 그는 그때 영화 <300>에 나오는 전투사들처럼 ’존엄한 마지막 싸움’을 해야겠다는 각오를 했다고 회상했다. 이렇게 급조된 부대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 지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의 임무는 민간인들이 피란을 떠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첫 전투에서 맞닥뜨린 건 러시아 탱크 16대였다. 이쪽은 보병과 포병 뿐이었다. 니콜라이는 “솔직히 정말 무서웠다”고 했다. “탱크에서 포를 쏘는 속도는 매우 빠르기 때문에 보병, 포병들은 알아차릴 새도 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군과 러시아군 양측 모두에게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탱크로 밀어붙이면 보병들은 도망을 가야 하는데, 앞쪽의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걸 보면서도 누구 한명 물러서지 않고 정위치를 지킨 채 수류탄을 던지며 전진한 것이다. 니콜라이는 당시 우크라이나 병사들이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싸웠다”고 전했다. 놀란 것은 니콜라이만이 아니었다. 그는 그때 “동료 중 누군가 러시아군이 ‘젠장,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기세에 질린 러시아군은 진격하지 못했다. 니콜라이는 그때 처음으로 “우리는 생각보다 강하고, 적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회상했다. 결국 러시아군은 4월 초 키이우 인근 전선에서 철수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1년] 변호사와 예능PD는 왜 총을 들었나

러시아군은 전세를 재정비해 돈바스로 병력을 집중했다. 우크라이나군도 병력을 돈바스로 대거 보내면서 니콜라이도 그곳으로 갔다. 그곳은 키이우 인근과 분위기가 달랐다. 키이우의 시민들은 우크라이나군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응원을 보내며 위험을 무릅쓰고 러시아군의 위치 정보까지 몰래 보내준 데 반해, 8년 째 전쟁에 시달리던 돈바스 주민들은 우크라이나군을 보고서도 냉담했다.

어느 편이든 전쟁에 아예 엮이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돈바스 주민들은 자기가 사는 지역에 그저 군인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느 쪽이든 일단 군대가 나타나면 포격과 폭격이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014년부터 시작된 돈바스 전쟁으로 인해 주민들 사이에서는 냉소와 환멸이 번지고, 러시아군의 전면 침공 이후로는 지역 전체가 초토화되고 있는 것이 돈바스의 현실이었다

그는 “그들도 우크라이나 국민이고,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군인으로서는 ‘우리를 환영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왜 목숨을 내던져야 하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무렵 돈바스 전선에까지 들려온 ‘부차 학살’ 소식은 그의 모든 걸 바꾼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됐다. 러시아군 점령 지역에 살고 있던 부대원 동료의 아내와 세 살, 다섯 살 난 아이들도 피란 도중 머리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채 발견됐다.

부대를 찾아온 경찰에게 그 소식을 들은 니콜라이는 “엄청난 분노를 느꼈다”며 “전쟁에 대한 생각이 다시 한번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군인들은 승리를 더욱 강렬하게 원하게 됐다. 일반 시민들도 ‘어떠한 협상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점에서 완전한 이정표”라며 “우리에게 이제 다른 길은 없다”고 말했다.

니콜라이는 이후 돈바스 지역을 떠나 지난 8월 하르키우 수복작전에 참여했다. 공교롭게도 노보라드 볼린스키에서 교전했던 러시아 부대를 다시 만났다. “이번에 러시아 쪽에는 10대의 탱크가 있었고, 우리는 또 보병이었습니다. 우리 부대는 100명 중 30명만 살아 남았지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투 사흘째가 되니 러시아군은 탱크를 잃는 것이 두려워 물러났죠. 결국 우리가 다시 해냈습니다.”

그는 하르키우에서 러시아군을 물리친 경험은 우크라이나 국경 내에서 러시아군을 쫓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무기만 갖추면 우크라이나군은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병력이 더 많으니까 우리에게는 정말 더 많은, 많은 무기가 필요합니다.”

우크라이나 전방에 급조해서 마련된 훈련장에서 설상 위장복을 입은 우크라이나 군인이 저격용 소총 사격훈련을 하고 있다.  | KISH KIM·다큐앤드뉴스코리아

우크라이나 전방에 급조해서 마련된 훈련장에서 설상 위장복을 입은 우크라이나 군인이 저격용 소총 사격훈련을 하고 있다. | KISH KIM·다큐앤드뉴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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