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무차별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햇수로 3년째에 접어들었다. 결사항전의 의지로 반격을 다짐했지만, 국제사회의 관심과 지원이 점점 줄어드는 가운데, 장기화된 우크라이나 전쟁. 그 속에서 평범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지금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개전 이래 최대의 공습이 있었던 2023년 12월 말부터 2024년 2월까지 분쟁지역 전문 저널리스트 김영미 피디가
특집 다큐 ‘가평전투, 호주군의 잊혀진 전쟁’은 잊혀진 전쟁의 슬픈 역사와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짚어보며 정전 70주년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키이우 | 박은하 유럽 순회특파원 수도 키이우 현지 표정밝은 표정의 키이우 시민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년을 맞은 24일 키이우 시내에서 군복을 입은 남성과 일상복 차림의 여성이 팔짱을 낀 채 걷고 있다. 키이우 | KISH KIM·다큐앤드뉴스코리아 장터 열리고 지하철도 운행 지하상가도 모두 문 열어 젤렌스키 대통령은 연설서 “백기 안 들고 우리 국기
우크라이나 키이우 유로마이단 광장 귀퉁이에 대전차장애물을 활용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키이우 | KISH KIM·다큐앤드뉴스코리아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를 방문했던 지난 20일(현지시간) 운동강사 다샤(25)는 키이우의 피트니스 센터에 있었다. 다샤는 일주일에 2~3일은 1대1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 센터로 출근한다. 출근하지 않는 날은 온라인으로 단체수업을 진행한다. 매일 하루에
우크라이나 전역에 새겨진 깊고도 짙은 전쟁의 상흔들 키이우의 한 지하보도 입구에 우크라이나 군 홍보 광고판이 내걸려 있다. 그 앞에서 한 여성이 꽃을 사고 있다.우크라이나 전황은 동부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수도 키이우에 도착했을 때 나는 전쟁을 체감하기 힘들었다. 공습경보가 가끔 울리고, 대전차 장애물이 거리 곳곳에서 보이는 것 외에는 여느 유럽의
특집 다큐 ‘비밀의 섬 지심도’ 는 무관심속에 방치된 일제강점기 군사유적과 그 의미에 대해 알아본다.
[다큐앤드뉴스코리아]미얀마 쿠데타1년 , 미얀마 청년들의 '꿈'절망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청년들의 의지와 꿈, 민주주의를 위한 연대가 어떻게 이뤄져야 할지 생각해 본다.
러시아군의 미사일 공격으로 집과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살아남은 스비틀라나 젤다크가 폐허가 된 자신의 집 앞에서 전쟁 전에 찍었던 가족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체르니히우 | KISH KIM·다큐앤드뉴스코리아 지난 19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체르니히우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체르니히우에 도착하기까지 2시간30분 동안 세 번의 검문을 거쳐야했다. 도로를 지키던 군인들은 버스를
[경향신문] “두 다리 잃었지만…나라는 지켰다”① 그들은 왜 총을 들었나 담담하게 전하는 ‘끔찍한 기억’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서 군복무를 하던 중 두 다리를 잃은 올레크 시모로스가 지난 17일 키이우의 오베리흐병원에서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지방정부의 인권 정책을 모니터링하는 변호사였던 그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2022년 2월24일 자원 입대했다. KISH KIM·다큐앤드뉴스코리아" loading=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외곽 도시 호스토멜에 사는 초등학생 블라디슬라우 빈차르스키(11)의 책상에는 유리병 여러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구슬, 레고블럭, 조개껍데기, 조약돌, 동전…. 유리병마다 무언가 한 가지씩 차 있다. 수집은 블라디슬라우의 취미이다. 블라디슬라우는 지난해부터 새로운 걸 모으기 시작했다. 포탄 조각이다. 건물, 차량, 도로 등에 명중한 후 산산조각난 포탄의 조각들을
키이우 | 박은하 유럽 순회특파원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동부 전선과는 거리가 먼 키이우에서도 병사는 어디에서나 눈에 띈다. 식당, 카페, 지하철, 버스터미널 등 일상 공간 어디에서나 군복 입은 이들을 만날 수 있다. 2022년 2월24일 러시아의 전면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에서는 징집병과 자원병을 합쳐 약 90만명이 병력으로 동원됐다. 지난 1년 간 발생한
김영미 다큐앤드뉴스 대표기자 미얀마 고문기술자 인터뷰 지난 2월 1일 미얀마에서 군부쿠데타가 일어난 이후 현재까지 체포된 사람은 4000여명으로 추정된다. 그중 고문으로 사망한 사람은 최소 300명이 넘는다고 알려졌다. 고문실에서 가혹 행위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다. 이들을 고문한 한 경찰과 인터뷰를 했다. ‘고문기술자’인 그는 양곤에 있는 인세인교도소를 거쳐 현재 일선 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