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사람들은 꽃을 산다, 총을 마주하면서
우크라이나 전역에 새겨진 깊고도 짙은 전쟁의 상흔들
우크라이나 전황은 동부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수도 키이우에 도착했을 때 나는 전쟁을 체감하기 힘들었다. 공습경보가 가끔 울리고, 대전차 장애물이 거리 곳곳에서 보이는 것 외에는 여느 유럽의 현대적 도시처럼 거의 모든 일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일상은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각자의 자리를 지키려는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노력이 모인 결과였다.
발전시설이 폭격당해 단전과 단수가 반복되었지만 LED 랜턴이나 발전기를 켜고 가게를 여는 상인, 공습경보가 해제되자마자 학교로 향하는 학생, 폭격으로 부서진 창문을 합판으로 막고 사는 주민들, 공습경보가 울려도 가로수를 심거나 도로를 청소하고 있는 정부 고용 인부들은 일상을 유지하면서 긴 전쟁에 맞서고 있었다.
6개월 전부터 전기와 물이 끊긴 최전방의 한 마을에는 남편과 아들이 둘 다 전방에서 전투 중이라 혼자 집을 지키며 기다리는 여인이 있었다. 직접 기른 가축과 농작물로 자급자족 중인 이 여인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우크라이나 국기를 꺼내 들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그는 우크라이나는 승리할 것이고 아들과 남편은 무사히 돌아올 것으로 믿는다며 해맑은 표정으로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제 이곳에서는 어떤 의미로든 전쟁에 관련되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연인은 상이용사가 되어 돌아오고, 조개껍데기를 줍던 어린아이는 포탄 파편을 모은다. 전쟁은 집단의 경험과 인생을 바꾸었다. 일상을 지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일상은 지난 1년간 이미 전쟁의 영향에 물들고 있다. 피와 살이 튀는 최전방은 말할 것도 없고, 후방에서조차 일상을 잠식하고 있는 전쟁의 그림자는 언제쯤 거둬질지, 거둬진다 해도 전쟁 전 평범한 일상을 되찾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