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요가·공습경보 공존하는 일상…포화 속에서도 삶은 꺾이지 않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를 방문했던 지난 20일(현지시간) 운동강사 다샤(25)는 키이우의 피트니스 센터에 있었다.
다샤는 일주일에 2~3일은 1대1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 센터로 출근한다. 출근하지 않는 날은 온라인으로 단체수업을 진행한다. 매일 하루에 한두 번씩 공습경보가 울리는 일상을 감안한 수업 방식이다.
키이우에서 공습경보는 주로 오전 8~9시 또는 오후 2~3시쯤 울리는 경우가 많다. 공습 시작과 해제 시 사이렌이 울리고 관공서, 호텔 등에서는 밖에 다니지 말라고 안내방송이 나온다. 밖에 나와 있으면 공습경보를 못 들을 수도 있기 때문에 시민들은 휴대전화에 관련 앱을 깔아놓고 확인한다.
시민들 반응은 차분하다. 실내에 있는 사람들은 경보가 내려진 동안에도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경우가 많다. 러시아군이 시민들을 지치게 하기 위해 경보가 울리도록 한다는 말도, 재침공을 위해 키이우 주변 에너지 시설을 파괴하고 있다는 말도 나오지만 정확한 정보는 확인할 길이 없다. 우크라이나 정부도 공습 경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해주지 않는다.
이런 일상 속에서도 요가수업 수강생은 전쟁 전보다 늘었다. 다샤는 “나도 신기하다”며 자신이 추측한 이유를 들려줬다. “스트레스를 견디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 아닐까 생각해요. 전쟁이 벌어지는 중이지만 키이우는 지금도 역동적으로 돌아가는 도시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다샤는 가끔 친구들을 초대해 집에서 식사도 한다. 달걀, 치즈 등 식료품 가격이 전쟁 전보다 2배 이상 올랐지만, ‘함께 하는 순간’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 전쟁 전에 찍은 여행 사진을 친구들과 함께 보며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린다. 기분이 좋아질 수 있도록 산책도 하고, 밤에 푹 자려고 노력하며, 때때로 일부러라도 웃는다.
웃음은 길어지는 전쟁을 버텨내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된다. 최근 이르핀의 자전거 공장이 러시아의 드론 공격으로 부서졌다는 뉴스를 보고 친구인 올레크가 “우크라이나의 친환경 교통을 방해해서 러시아 석유를 많이 팔고 싶은 모양”이라는 유머를 구사해 모두 함께 깔깔댔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런 다샤도 2월 24일이 다가오는 것은 두렵다고 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1주년이 되는 날이다. ‘러시아군이 국경지대에 전투기를 끌어모으고 있다 ’, ‘러시아가 대공습을 준비한다’, ‘봄에 다시 큰 전투가 벌어질 것’ 등이라고 전하는 뉴스를 보면 불안감이 들 수밖에 없다.
키이우는 지난해 4월 초 러시아군이 물러간 이후 일상을 거의 회복했지만 위험에서 온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러시아가 ‘겨울 추위’를 무기로 이용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시설을 공격했던 지난해 10월 자폭 드론이 날아와 다샤가 사는 아파트 바로 맞은편 건물에 돌진했다. 다샤는 자신의 집 베란다에서 폭발과 화재가 발생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바이든 대통령의 키이우 방문은 다샤에게 안도감을 심어줬다. 다샤는 우크라이나인이 고립돼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해 위안이 됐다고 했다. 하지만 다샤는 외부의 도움과 전선에서의 싸움 못지않게 키이우 시민들이 패닉에 빠지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도시와 여기에서의 삶이 좋아서 피란 가지 않았다”는 다샤는 시민들이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 역시 러시아에 지지 않으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일상의 전투’들은 어디에나 구석구석 스며들어 있다. 다샤가 사는 아파트 입구 게시판에는 우크라이나 국기가 그려진 공지가 붙어있다. 건물 내에서 담배 피우지 말고 꽁초를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 공지문은 “우크라이나에 영광을. 국토를 더럽히지 맙시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24일이 가까워져 올수록 우크라이나 국기를 걸거나 노란색과 파란색으로 이뤄진 장식물을 걸어놓은 상점들이 늘어났다. 검은색 바탕에 흰 글씨로 “나는 모스크바가 싫다”고 적힌 케이스에 휴대전화를 넣고 다니는 이들도 있다. 탱크의 진격을 막을 용도로 H빔을 교차해 만든 대전차장애물이 거리 곳곳에 설치돼 있다.
하지만 모두가 나라의 운명이나 전쟁에 관한 이야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방탄용 모래포대를 쌓아둔 지하철역 앞에는 꽃 노점상이 두 명이나 있고 시민들은 이따금 장미 한 두 송이를 사 갔다. 꽃은 총보다 강하지 않지만,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전쟁 중인 나라에서도 꽃은 소중하다.
21일 키이우의 한 식당 앞에서 만난 루한스크 출신 청년은 한국에서 온 기자라고 하니까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라며 휴대전화로 <사랑의 불시착> 포스터 사진을 보여줬다. 루한스크는 가장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 중 하나이지만 그는 전황보다 한국 드라마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다.
그 청년 옆에는 식사하고 나온 뒤 눈시울을 붉힌 채 서로 꼭 안고 놓지 않는 아내와 남편, 딸로 이뤄진 가족이 있었다. 버스터미널에서는 “아빠 가지 마”라고 외치는 듯 울적한 표정을 한 어린아이를 군복 입은 아버지가 달래는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군인 가족 지원 조직 ‘베테랑허브’에 따르면 최전방에서 복무하는 군인은 가족들과 1년 이상 연락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키이우 중심가에서 동쪽으로 25㎞가량 떨어진 ‘숲 묘지공원’은 겉보기에 평화로워 보이는 일상 뒤에 드리워진 슬픔과 그리움이 가장 진하게 농축돼 있는 곳이다.
숲 묘지공원 입구에서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전사자의 묘역이 나온다. 이 구역에는 다른 구역보다 훨씬 크고 화려한 화환이 놓여 있으며 우크라이나 국기가 세워져 펄럭인다. 소련 시절 벌어진 아프가니스탄 전쟁, 러시아가 수행한 체첸 전쟁, 돈바스 전쟁 그리고 현재 러시아와의 전면전에 참여했다 사망한 군인들이 묻힌 구역이다.
2022년에 세워진 묘비가 많았다. 키이우에서 돈바스 전황을 제대로 알기는 쉽지 않다. 격렬한 전투가 매일 벌어지고 있어 취재진이 접근하기 쉽지 않을뿐더러 우크라이나 정부 역시 정보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은 묘역에서도 지난해 12월과 지난 1월 두 달 사이 전사자가 부쩍 늘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 22일 우크라이나 특수부대원 4명이 한 묘비 앞에서 참배를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름을 각각 안드레이, 드미트리, 아나톨리, 빅토르라고 밝힌 이들은 지난달 바흐무트 전투에서 숨진 동료의 묘를 찾아왔다고 했다. 이들은 동료의 영정사진 앞에 담배를 꽂고, 햄을 얹은 토스트와 피클, 위스키병을 꺼내 가지런히 놓았다. 유튜브에 접속해 고인이 좋아하던 음악을 틀었다. 안드레이는 손에 쥔 노란색, 파란색 꽃을 차마 놓지 못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영정사진을 한참 바라봤다. 빅토르는 말없이 위스키를 들이켰다.
또 다른 묘비 앞에서는 아내 리나가 어린 딸 키라와 함께 지난달 루한스크에서 지난달 전사한 남편을 추모하고 있었다. 리나는 “남편은 에너지가 넘치고 농담도 잘하는 사람이었다”고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아이는 조용히 엄마 손을 잡았다.
묘비가 아직 세워지지 않았지만 관이 들어갈 자리를 골라놓은 구역도 있었다. “러시아군, 솔레다르 점령”, “우크라이나 당국, 구호단체에 바흐무트 대비 권고” 등의 건조한 기사가 뜨는 동안 이곳 묘지공원에는 시신이 대거 실려 오고 있었다.
안나(28)는 지난해 12월 바흐무트에서 숨진 남자친구 예브게니(사망 당시 27세)의 묘를 찾았다. 안나가 지갑에서 꺼내 보여준 예브게니의 군번표에는 빅토르 초이의 밴드 키노가 부른 노래 ‘혈액형’ 가사처럼 이름과 생년월일, 혈액형이 적혀 있었다. 예브게니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키이우 시민이었며 직업군인이었다. 안나는 “내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었다”며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 달 동안 아무것도 못 했다”고 말했다.
안나는 예전에 갖다 놓았던 바싹 마른 꽃이 있던 자리에 새 꽃을 놓고 촛불을 켜 위패 앞에 놓았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예브게니의 사진을 한참 바라봤다. 그는 “내가 전쟁터에 있던 그를 기다렸으니까 이제는 그가 나를 기다릴 차례”라고 말했다.
해가 뉘엿뉘엿 졌다. 2월 24일이 한 발짝 더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