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미얀마 고문, 그들은 악마다

[경향신문]미얀마 고문, 그들은 악마다

다큐앤드뉴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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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쿠데타에 반대하는 미얀마 시민 불복종 운동이 넉달을 넘겼다. 그동안 양곤이나 만달레이 등 대도시의 대형 시위는 사라졌다. 군부의 강경진압이 시위를 잦아들게 했다. 그러나 군인들의 진압이 상대적으로 느슨한 대도시 골목길과 지방 소도시 혹은 농촌에서는 여전히 시위가 이뤄지고 있다. 미얀마 군부에 시위대는 무조건 체포대상이다. 잘 훈련된 군인들이 시위대의 특정인을 목표로 정해 달려들면 민간인들은 그냥 잡힐 수밖에 없다. 1980년대 한국을 연상하면 된다. 딱 그 모습이다. 시위 때마다 쫓고 쫓기는 광경에서 1987년 6월항쟁 때를 타임머신 타고 가는 느낌이다.

시위를 하다가 체포되면 일단 경찰서로 끌려간다. 경찰서 안에는 고문실이 있다. 미얀마 사람들 대부분은 그 공간에 잡혀들어가면 엄청난 고문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구타는 물론 물고문, 전기고문 등 각종 고문을 당한다. 시위대는 잡히면 이 고문실로 직행이다. 민 튠(21·가명)은 지난달 중순 만달레이에서 시위하다가 군인들에게 잡혀갔다.

그는 “사복을 입은 군인들이 아주 평범한 차에 타고 지나가다가 시위대로 돌진했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렸다. 고개를 드는 순간 발차기가 날아왔고 정신을 잃었다”고 체포되던 순간을 말했다. 그리고 군인들에게 끌려가 던져진 곳은 인근 경찰서. 경찰서에 도착하자마자 태어나 처음 겪는 폭력이 자행됐다. 주로 얼굴을 집중적으로 가격당하며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그가 끌려간 곳은 고문실, “아주 환한 방이었다. 가자마자 역겨운 냄새가 풍겨왔는데 피비린내 같았다. 나는 거기서 바로 주저앉았다. 영혼이라도 팔고 싶었다. 내가 그들에게 고문당할 차례임을 느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는 정확하게 이틀을 그 경찰서에 있었다. 그동안 그는 수없는 구타를 당하고 노끈으로 목을 졸라 당기는 고문을 당했다. “한 경찰이 노끈을 들고 와서 내 목에 감고 조였다 풀어 줬다를 반복했다. 그 노끈이 목을 조일 때는 눈앞이 흐려지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살짝 풀어주고 다시 노끈을 조이고 수없이 반복했다”고 증언했다.

미얀마 양곤에서 한 시민이 군경에 구타당한 뒤 체포돼 끌려가고 있다.  / 다큐앤드뉴스 제공

미얀마 양곤에서 한 시민이 군경에 구타당한 뒤 체포돼 끌려가고 있다. / 다큐앤드뉴스 제공

■“죽여달라” 하고 싶은데 목소리 안 나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당하는 거대한 폭력이었다. 노끈이 목을 조일 때 그는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게 고통을 주는 수법이었다. 이들은 한두 번 이런 기술을 써먹은 게 아닌 듯했다. 숙련된 기술을 가진 그들은 죽이지 않으면서 고통을 주는 달인들이었다”고 말했다. 그가 이 고통을 벗어나 경찰서에서 풀려난 큰 이유는 지인이 경찰서의 높은 사람에게 돈을 주었기 때문이다. 경찰서에서 교도소로 입감되기 전에 뇌물을 주면 풀려날 수도 있다. 그는 운 좋게 돈으로 풀려난 경우다. 그러나 서민들은 큰돈을 마련하지도 못하고 인맥도 없다. 죽지 않을 만큼 고문당하고 교도소로 향한다. 그곳엔 또 다른 고문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양곤 시내에 있는 인세인교도소는 미얀마의 민주화 시위가 일어난 후 ‘악마의 교도소’라 불린다. 이 교도소는 영국 식민지 시절인 1887년에 지어졌다. 그후 열악한 환경과 잔인한 고문으로 악명 높은, 군부 정권을 대표하는 교도소가 됐다. 지난 2월 1일 쿠데타 이후 이 교도소는 시위에 참여했다 체포된 이들로 가득하다. 가뜩이나 냄새나고 불결한 환경에 사람들이 밀집해 수용됐다. 지옥이 따로 없다. 식사는 모래와 작은 돌이 섞인 밥 한공기만 나오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된 담요도 없다.

여기 수용된 정치범에게는 이런 시설이 문제가 아니다. 제일 고통스러운 것은 고문이다. 인세인교도소의 고문은 미얀마에서 악명 높다. 구타는 물론 전기고문과 여성에 대한 성고문이 가장 많이 자행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인권단체 정치범지원협회(AAPP)는 쿠데타 이후 현재까지 4300명 이상이 체포 및 구금됐는데, 이중 상당수가 양곤의 인세인교도소에 수감됐다. 현재 정원인 5000명의 두 배가 넘는 1만3000명이 수감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고문을 당하다 사망하는 경우도 속출한다. 현재까지 정확한 통계는 나오지 않지만, 최소 21명에서 많게는 300여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다. 고문으로 사망한 가장 끔찍한 사례가 몽유와의 시인 심장 적출 사망 사건이다. 시인 켓 띠는 군부에 의해 체포돼 구금된 지 하루 만에 사망했다. 충격적인 것은 그의 시신에서 심장 등 장기가 제거된 채 유족들에게 돌아왔다는 것이다. 고문받은 지 단 하루 만에 장기가 적출되는 등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다. 사망하기 전에 켓 띠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그들(군부)은 머리에 총을 쏘지만, 우리 가슴 속 혁명은 모른다”는 글을 남긴 저항시인이었다.

체포 구금 중에 사망해 시신이라도 돌아온 경우는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대부분 시신을 찾지 못한다. 일부 경찰과 군인은 시신을 인도하는 조건으로 돈을 요구하기도 한다. 양곤 외곽 도시 바고에 사는 청년 민 튠(29)은 “고문으로 친구를 잃었다. 친구 부모와 함께 시신을 인도받으려는데 그들은 돈을 요구했다. 큰돈이었지만 친구의 부모는 돈을 내고 시신을 찾아왔다. 미얀마 국민이 군인들에게 치를 떠는 것은 고문도 고문이지만 돈 받고 시신을 받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런 세상을 상상도 못 했다”고 말했다.

6월 16일 미얀마 디모소시에서는 쿠데타 군경들이 시위하는 시민들을 잡지 못하자 일반시민들의 차량과 집에 불을 질렀다. 군경의 보복성 방화는 미얀마 전역에서 이뤄지고 있다. / 경남이주민연대 제공

6월 16일 미얀마 디모소시에서는 쿠데타 군경들이 시위하는 시민들을 잡지 못하자 일반시민들의 차량과 집에 불을 질렀다. 군경의 보복성 방화는 미얀마 전역에서 이뤄지고 있다. / 경남이주민연대 제공

■최대 300명 사망… 대부분 시신 못 찾아

힝몽 마웅(25·가명)은 지난 4월 시위 도중 군경에 의해 체포됐다. 그러나 그는 그 뒤를 기억하지 못한다. 끔찍했던 고통만 기억할 뿐 교도소에서의 3주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체포되던 순간, 나의 몸이 무언가에 의해 날아가던 기억이 나고 눈 떠보니 집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3주간 인세인교도소에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기억이 전혀 없다. 단지 살이 타는 냄새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의 기억은 있다”고 말했다. 마웅의 어머니는 “딸이 인세인교도소에 잡혀갔다는 말을 듣고 집안의 온갖 인맥과 돈을 썼다. 그렇게 석방할 수 있었는데 교도소 문이 열리고 나온 딸의 모습은 만신창이였다. 내 딸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마웅의 긴 머리는 마구 잘려져 있었고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팔과 다리가 화상투성이며 쇄골이 부러지고 이가 3대나 나갔다. 어떤 고문을 당했는지 전혀 기억을 못 하는 마웅에게 “고문한 도구가 긴 막대 모양인가? 아니면 전기 충격기인가?”라고 여러 질문을 던져 보았지만, 그는 전혀 기억을 못 했다. 어쩌다 기억을 잃었을까.

기자는 그동안 세계 여러 나라를 취재하며 많은 고문 피해자를 만났다. 그들 대부분은 신념과 사상으로 무장돼 있었다. 언제든 체포돼 고문을 당할 각오를 한 사람들이었다. 미얀마 고문 피해자들은 그들보다 더욱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였다. 인세인교도소에서 석방되거나 경찰서 단계에서 풀려난 경우에도 고문 후유증을 심하게 앓았다. 육체적 고통만큼 정신적 고통이 아주 심해 보였다. 대부분 석방된 이후 잠을 못 자고 마웅의 경우는 기억력 장애까지 보였다. 미얀마 고문 피해자들의 공통점은 불과 넉달 전까지만 해도 너무나 평범한 시민이었다는 것이다. 체포돼 고문당한 그들은 신념과 사상이 없었다. K팝을 좋아해 국내 아이돌 팬클럽에 가입하거나 공부만 하던 학생이었다. 평범하게 직장 다니던 사람들도 많았다. 저항시위를 한다고 생각도 못 했던 평범한 시민들이 갑자기 엄청난 폭력과 고문을 당한 것이다. 그 충격이 사상과 신념을 가진 다른 나라 고문 피해자들보다 더 큰 듯했다.

양곤에 위치한 인세인교도소 정문/  김상범 기자

양곤에 위치한 인세인교도소 정문/ 김상범 기자

인세인교도소 내부에 위치한 접견실 모습 / 다큐앤드뉴스 제공

인세인교도소 내부에 위치한 접견실 모습 / 다큐앤드뉴스 제공

■정신적 고통에 심한 고문 후유증

군부는 이런 점을 십분 이용했다. 몽유와 시위를 주도하던 ‘판다’라 불리던 웨이 모 나잉은 지난 4월 체포된 후 얼굴이 엉망인 채로 국영방송에 나타났다. 그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상처와 멍이 가득했다. 양곤의 한 지역에서 12명의 남녀 시위 주동자가 체포된 적이 있다. 그들 또한 고문당한 끔찍한 모습 그대로 방송에 내보냈다. 대부분의 독재국가는 국제사회의 비난이 두려워 설사 고문을 했어도 안 했다고 발뺌하거나 보이지 않는 신체 부위를 고문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러나 미얀마 군부는 차원이 달랐다. 마치 고문을 자랑하듯이 ‘트로피’처럼 전 국민이 보는 프라임 뉴스 시간에 내보냈다. 이것은 국민에게 ‘시위에 나가면 당신들도 이렇게 된다’는 메시지였다. 두려움을 무기로 군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는 심리전이다.

고문은 인류 역사에서 미개했던 시간 동안 등장한 반인권적인 방법이다. 미얀마 시위대는 시위에 나갈 때마다 체포돼 고문을 당하는 일을 각오해야 한다. 양곤에서 저항시위를 하는 린 까웅(22·남)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세상이다. 우리 세대는 민주주의 교육을 배우고 자란 사람들이라 도저히 이런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했다. 우리의 6월항쟁이, 그리고 그 시절 체포돼 고문당했던 슬픈 역사가 오버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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